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서울지역 30여 개 대학 학생 약 10만 명이 집결했다. 이들은 계엄령 해제, 민주화 추진, 신군부 퇴진 등을 요구하며 당시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총학생회장단은 남대문과 도심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자진 해산을 결정했다. 이 역사적 사건이 바로 ‘서울역 회군’이다.
서울역 회군은 1979년 10·26 이후 이어진 ‘서울의 봄’을 상징하는 마지막 대규모 민주화 시위였다. 당시 학생 지도부는 공수부대 투입 가능성과 대규모 유혈 충돌을 우려해 시위를 중단하는 것이 더 큰 희생을 막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정부가 정치 일정 정상화와 민주화 추진을 약속한 점도 회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결과는 학생들의 기대와 달랐다. 불과 이틀 뒤인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과 학생 지도부를 대거 연행했으며 대학을 폐쇄했다. 이어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고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서울역 회군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 저항이 약화되면서 광주가 사실상 고립됐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서울역 회군을 둘러싼 평가는 지금까지도 크게 엇갈린다.
비판적인 시각은 당시 10만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의 힘을 유지했다면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더 강하게 맞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회군이 신군부에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광주를 더욱 고립시켰다는 주장이다.
반면 옹호하는 시각은 당시 학생들이 군의 실제 작전 계획과 강경 진압 의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무리한 도심 진출은 서울에서도 대규모 유혈사태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회군은 무책임한 후퇴가 아니라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역사학계 역시 서울역 회군을 단순한 실패나 성공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당시 학생 지도부는 제한된 정보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으며, 이후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군사력 투입은 이미 상당 부분 준비돼 있었다는 분석도 제시된다. 따라서 회군은 당시 민주화 세력이 직면했던 정치·군사적 한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서울역 회군은 오늘날에도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논쟁거리다. 민주화운동의 결정적 분기점이자 ‘서울의 봄’이 막을 내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되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선택과 지도부의 책임, 역사적 판단의 무게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