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제재를 피해 원유를 거래해온 ‘그림자 선단(Shadow Fleet)’ 유조선들이 한 다국적 보험사로부터 대거 보험을 가입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28일(현지시간) 이 회사가 러시아·이란산 원유 운반 선박에 보험을 제공한 혐의로 뉴질랜드 경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로이터의 장기 탐사보도에 따르면 뉴질랜드 금융범죄수사대는 이달 16일 ‘매리타임 뮤추얼(Maritime Mutual·MM)’의 오클랜드와 크라이스트처치 사무소, 관계자 주택 등을 급습해 문서와 기록을 확보했다. 경찰은 현재 3명을 조사 중이며, 미국·영국·호주 등과 공조수사를 진행 중이다.
MM은 “모든 제재와 법규를 준수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뉴질랜드 외교부는 “규제 관련 사항으로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확인했다.
로이터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MM은 2018년 이후 총 231척의 유조선을 보험에 가입시켰고 이 가운데 130척은 제재 이후에도 러시아·이란산 원유를 운송했다. 운반된 에너지 규모는 이란산 182억달러(약 26조원), 러시아산 167억달러(약 2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그림자 선단’은 공식 운항 정보를 숨기거나 위조해 제재망을 피해 움직이는 유조선 집단을 뜻한다. 이런 선박은 제3자 피해에 대한 배상책임을 보장하는 보호·배상보험(P&I)이 없으면 운항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보험 제공은 제재 회피를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로 지목된다.
MM은 그동안 유조선 보험 가입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주요 해운정보 업체와도 관련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터는 독자적 취재로 미국과 유럽연합 제재 대상인 621척 중 97척이 MM 보험에 가입한 이력이 있으며, 이 중 48척은 제재 당시에도 계약이 유지된 사실을 확인했다.
한편, MM은 북한 선박의 보험을 제공한 전력도 있다. 일본 정부는 2005년 이 회사를 ‘북한 선박 보험사’로 지목했으며, 이듬해 창업자가 뉴질랜드 당국에 “현재는 북한 선박과 계약이 없다”고 해명한 내용이 미국 외교전문을 통해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국제 해운보험 체계의 투명성 문제를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한 해운안전 분석가는 “제재 회피 선박의 운항을 막기 위해선 보험사 네트워크의 실명제와 공시 의무 강화가 필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