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26일 출범한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은 납치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며 일본 외교·안보정책의 방향을 대대적으로 재편했다. 고이즈미 내각 시절 평양회담 이후 교착 상태에 빠진 북일 관계를 재정비하기 위해 9월 29일 각의 결정으로 납치문제대책본부가 출범했고, 아베 총리가 직접 본부장을 맡았다. 시오자키 야스히사가 납치담당장관을 겸임했고, 외무성 북동아시아과와 경찰청 범죄수사국 등이 실무를 담당했다. 본부는 피해자 전원 귀국 실현, 진상규명, 가해자 인도, 국제여론전, 국민 홍보 및 교육 교재 반영 등 8대 대응 항목을 중심으로 체계를 세웠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첫 핵실험을 실시하자, 일본 정부는 같은 날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아베 총리는 “국민 안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 규정하며 초강경 대응을 지시했다. 10월 13일 각의는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와 별도로 독자 제재를 단행했다. 주요 내용은 ▲북한 선박의 일본 항만 입항 전면 금지 ▲북한산 상품 수입 전면 금지 ▲북한 인사의 입국 불허 및 자산 동결 ▲대북 송금·투자 제한 ▲보험·재보험 금지 등이다. 특히 ‘만경봉 92호’ 입항 금지 조치는 납치자 귀환 압박의 상징으로 여론 결집 효과를 거뒀다. 일본은 유엔보다 앞서 제재를 시행한 첫 국가가 됐다.
아베 내각은 국내 법제 정비에도 속도를 냈다. 2006년 12월 22일 전후 처음으로 교육기본법을 전면 개정해 제2조에 ‘전통을 존중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태도’를 명시, 애국심 교육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2007년 1월에는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해 국방정책 입안과 예산 권한을 강화했다. 같은 해 5월 14일 제정된 국민투표법은 헌법 개정 절차를 명문화해 후일 개헌 추진의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정치적 추문과 행정 불신이 정권을 흔들었다. 2007년 5월 사회보험청의 연금기록 5천만 건 누락 사태로 지지율이 30% 미만으로 떨어졌고, 농림수산상 마쓰오카 도시카쓰의 자살 사건 등 잇단 스캔들로 내각의 신뢰가 붕괴했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83석에 그쳐 민주당(109석)에 참패, 여소야대가 형성됐다.
아베는 9월 12일 기자회견에서 “궤양성 대장염 악화와 정책 교착”을 이유로 사임을 발표했다. 후임으로 후쿠다 야스오가 9월 25일 제91대 총리에 취임했다.
비록 1년 남짓한 단명 내각이었지만, 아베는 납치문제를 일본 외교의 기축 의제로 고정시키고, 2007년 인도 의회 연설 ‘두 바다의 합류’에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OIP)의 사상적 기반을 제시했다. 이 비전은 훗날 미·일·호·인 4개국 안보 협력체 ‘쿼드(Quad)’의 이념적 출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