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3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소련 태평양함대가 상륙작전을 전개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군 수비대 일부가 저항했으나 17일에는 소련군 제25군이 청진을 점령했다. 지금도 청진에는 소련군 전사자 묘역과 기념비가 남아 있고, 매년 추모식이 열린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한반도의 해방 전투’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이다.
최근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가 “소련군이 한반도 해방에 기여한 사실이 한국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소련군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희미한 이유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소련군 진주가 곧바로 북한 체제 수립으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소련의 ‘해방’은 동시에 또 다른 분단과 이념 대립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항복 배경을 두고도 논란은 이어진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 참전 중 어느 쪽이 결정적이었는가에 대해 학계는 의견이 갈린다. 일본이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을 우려해 항복했다는 주장은 일면 타당하지만,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과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항복이 그렇게 신속히 이뤄졌을지 역시 불확실하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 진공 명령이 있었다는 기록 역시 북한 공식 서술을 통해 확대된 면이 많다. 실제로 조선인 유격대가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에 소속돼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작전이 청진 점령과 해방의 결정적 요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해방 직전 한반도 북부에서 벌어진 청진 상륙작전은 중요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대한민국에 잊힌 해방 전투’로만 규정하거나, 미국의 역할을 전적으로 지우려는 시각은 균형을 잃는다. 해방은 소련군의 남하와 미군의 원폭 투하, 그리고 일본 내부의 붕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정 국가의 기여를 과장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할 위험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