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 교수의 1주기 추도회가 열렸다. 생전에도 넓은 품과 실천으로 주변을 이끌던 그였지만, 떠난 뒤에야 그의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멀리, 얼마나 깊게 퍼져 있었는지 더욱 분명해졌다. 행사장에는 약 300명이 모였고, 각자가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과 아쉬움을 꺼내놓았다. 뒤풀이 자리에서는 서로의 기억이 겹치며 그가 남긴 발자국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정 교수의 삶은 실천 그 자체였다. 청년기 달동네에서 시작한 ‘공동육아’ 활동은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실험이자 도전이었고, 이후 ‘어린이어깨동무’, ‘하나둘학교’로 이어지며 남북을 아우르는 돌봄 운동으로 확장됐다. 북한의 어린이를 향한 관심, 탈북 청소년을 위한 지원, 공동체를 세우는 교육 실험은 그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대표적 작업들이다. 그는 스스로를 ‘실천 인류학자’라고 불렀으며, 박혜란 선생이 추도사에서 언급했듯 ‘사기캐’라 할 만큼 누구보다 앞장서고 누구보다 많이 움직였다.
추도회는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정진경 선생은 혼자가 되었음에도 담담히 자리를 지켰고, 오랜만에 만난 조한혜정 선생은 여전히 기운찬 모습으로 주변을 격려했다. 후카이도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을 모셔오던 현장을 함께했던 정태춘 가수는 노래 세 곡과 시 낭송으로 분위기를 채웠다. 그의 목소리는 그 시절의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 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