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핵심 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해부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오래 이어져 왔다. 침술·한약 등이 일부 질환에서 효과를 보이는 사례가 축적됐지만, 경락이 현대 의학적 구조로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영역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1960년대 주장한 ‘봉한학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61년 김봉한 평양의학대 교수는 인체에 제3의 순환계가 존재한다며 경락의 해부학적 구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를 ‘봉한관’이라 명명하고 피부·내장·뇌를 잇는 미세한 관 속에 ‘산알’이라는 특수 입자가 흐른다고 설명했다. 김봉한은 북한 과학계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고 연구는 체제 선전 수단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1966년 김봉한의 이름이 돌연 사라지고 경락연구원도 폐지되면서 봉한학설은 한동안 사실상 종적을 감췄다.
남한에서는 폐기된 이 이론이 2000년대 ‘프리모관’이라는 새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미국 유학 시절 김봉한 논문을 접한 故 소광섭 서울대 교수가 귀국 후 연구를 재현하려 시도하면서다. 소 교수팀은 다양한 염색법을 적용해 혈관·장기 표면·림프관 등에서 유사한 구조물을 관찰했다고 주장했다. 연구자들은 이를 국제 학회와 시연을 통해 소개하며 독립적 순환체계로 인정받으려 했지만, 주류 학계의 반응은 미미했다.
봉한관 연구가 학계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재현성 부족이다. 프리모관 연구자들은 시연을 거친 연구자들만 관찰에 성공했다고 주장하지만, 외부 연구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관찰하는 데 실패했다. 독립된 재현 연구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인체 기관이라는 주장은 과학적 검증 절차를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락의 과학화에 대한 기대도 한계를 드러낸다. 봉한관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한의학의 경락 개념과 직접 연결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피부·장기·림프관에서 발견된 구조물들이 실제로 하나의 연결망을 이루는지, 침 자극과 생리적 반응이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 등 핵심 질문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다.
봉한학설은 과학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갈래 가능성 사이에 놓여 있다. 착시나 선입견이 만들어낸 오류일 수도 있고, 시대의 벽에 가려진 발견일 수도 있다. 프리모관 연구가 후대의 객관적 검증을 통해 새로운 생물학적 체계를 밝힐지, 혹은 또 하나의 미완성 가설로 남을지는 앞으로의 과학적 재현 연구가 결정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