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폐막한 경주 APEC 정상회의의 숨은 관전 포인트는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을 앞두고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CNN이 임진각 인근 카페를 통째로 빌려 생중계를 준비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북미 대화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한때 고조됐다.
트럼프는 “김 위원장도 내가 한국에 간다는 걸 알고 있다”며 “그와 매우 잘 지내왔다”고 말했고,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로 지칭했다. 이는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순방 일정 연장과 대북 제재 해제 카드까지 내비친 트럼프의 행보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구애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최선희 외무상을 러시아로 보내 푸틴 대통령을 접견하게 하고, 트럼프 방한일에 맞춰 서해상에서 전략순항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트럼프의 ‘러브콜’에 정면으로 퇴짜를 놓은 셈이다. 그는 귀국길 에어포스원 안에서 “그를 만나러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한국을 떠났다.
이 장면은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달라진 한반도 정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미국이 고집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A)’는 이제 ‘불가역적 핵보유’로 바뀌었다. 북한은 제재에도 버틸 체력을 길렀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라는 든든한 후견인을 얻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그 카드가 유효하다.
결국 북한의 태도 변화는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이후 30년 넘게 이어진 비핵화 담론은 현실성이 사라졌다. 북한은 NPT 탈퇴(1993년)와 연이은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완성했고, 유엔총회에서는 “핵은 주권과 생존권의 상징”이라며 노골적으로 핵보유를 천명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 비핵화는 환상에 가깝다. 현실적 억지력과 협상력을 높이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미국으로부터 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을 이끌어 낸 것은 의미가 크다. 한국은 잠수함 건조 기술과 소형모듈원자로(SMR) 역량을 갖춘 몇 안 되는 나라다. 여기에 더해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확보하는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북한도 언제까지 미국의 손짓을 뿌리치진 못할 것이다. 트럼프가 재집권을 염두에 둔 채 북미관계를 다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질 경우, 김정은은 자신의 몸값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판단할 때 대화 테이블에 복귀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때 한국이 어떤 위치에 서 있을지다.
한반도의 안보 지형이 다시 요동치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더 이상 현실적 목표가 아니다.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핵 억제와 경제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할 전략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외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