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8월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8월 23일 도쿄를 먼저 방문해 이시바 총리와 회담을 진행, 17년 만에 한일 정상 공동언론발표문을 도출했다. 이번 선(先) 방일은 미국 방문의 성과 극대화와 한미일 공조의 안정성 부각이라는 계산이 깔렸다는 평가다. 이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와 8월 19일 요미우리 인터뷰를 통해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 “셔틀 외교 복원”, “과거사 피해자 입장 고려” 등의 원칙을 예고했고, 실제 도쿄 회담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 계승, 청년·사회교류 확대, 한반도 비핵화 의지 재확인, 한미일 협력 중요성 재확인 등으로 구체화했다.
정상회담의 맥락은 분명하다. 트럼프 행정부 하 미일 관세 협상(상호 15% 합의)과 방위비·관세 압박이 재부상하는 가운데, 한국은 먼저 일본과 보폭을 맞춰 미국과의 담판 리스크를 낮추는 길을 택했다. 이 선택은 일본 내부의 ‘반(反) 이재명’ 우려를 누그러뜨리는 부수 효과도 냈다. 요미우리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은 “국가 간 약속의 존중과 정책 일관성”을 언급하면서도 “과거사 피해자 관점 고려”를 병기해 균형 신호를 보냈고, 공동발표문에서는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 입장 계승이 재확인됐다.
이번 합의는 실무 과제도 남겼다. 첫째, 구조적 협력 어젠다다. 양측은 저출산·고령화, 수도권 과밀, 농업, 재난안전 등 ‘공통 난제’에 대한 당국 간 협의체 출범에 뜻을 모았다. 성과가 시민 체감으로 이어지려면 지자체·민간을 포괄한 사업 설계와 예산 연계가 필수다. 둘째, 미해결 현안 관리다. 강제징용 해법의 실행력, 일본산 수산물 수입 재개 요구, 만료가 임박한 한일 대륙붕 협정 등은 단계적 신뢰 구축 없이는 언제든 파열음을 낼 수 있다. 한국이 “기체결 합의 존중”을 재확인한 만큼 일본도 피해자 공감 확보를 위해 보다 적극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셋째, 정치 일정 리스크다. 이시바 내각의 취약한 국내 기반과 차기 총리군의 역사 인식 스펙트럼은 외교 연속성의 불확실성 요인이다. 회담에서 드러난 양 정상의 친교 제스처와 “서민적 소통”이 긍정적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제도화·법제화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권 변동기에 후퇴할 수 있다.
정책 노선의 계보 측면에서 이번 방일은 김대중 정부 모델과의 유사성이 도드라진다. 역사·경제·안보의 균형 접근, 1998년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의 연장선상에서 실용과 미래 지향을 결합했다는 점이 그렇다. 다만 2025년의 환경은 더 험난하다. 미·중 경쟁의 첨예화, 북핵 고도화, 통상·안보의 연동(관세·공급망·방위비)의 가속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 구도에서 한일 협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는 레버리지가 될 때 비로소 실용 외교의 실효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