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의 상징적 존재였던 ‘인계철선(Trip Wire)’ 개념이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미국이 4500명 규모의 주한미군 철수를 시사하면서, 지상군 중심의 억제력보다는 중국 견제를 위한 전략적 유연성에 방점이 찍히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 8월 8일 기자간담회에서 “숫자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병력 감축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미 국방수권법에 명시된 2만8500명 가운데 16% 수준에 해당하는 4500명이 빠질 경우, 그 대상은 지상군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경기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 주둔 중인 제210야전포병여단까지 철수할 경우, 북한 장사정포를 억제하는 주한미군의 직접적 지상 전투 능력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인계철선’은 한반도 유사시 미군 희생자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이미 오래전부터 균열을 보였다. DMZ 인근 미군 초소가 한국군에 이관된 1991년 이후 미 2사단이 ‘인계철선’ 역할을 대신했지만, 2003년 러포트 전 주한미군사령관조차 “파산한 개념”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최근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층인 ‘마가(MAGA)’ 진영에서 “한국이 주한미군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며 철수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번 감축 움직임은 단순한 병력 조정이 아니라 동맹 구조 자체의 변화를 시사한다. 미국은 한국군이 북한과의 재래식 전쟁을 전담하고, 자신들은 북핵 억제와 중국 견제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적 전환을 추진 중이다. 과거 한반도 전쟁 시 미국이 69만 증원 병력과 항모전단을 전개하기로 했던 ‘시차별부대전개목록(TPFDL)’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셈이다.
한·미동맹도 ‘빛 샐 틈 없는 동맹’이라는 수사와 달리 사실상 ‘쇼윈도 부부’로 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을 금전적 거래 대상으로 간주하며 방위비 분담과 전략적 유연성을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단순한 주둔군이 아니라 중국을 견제하는 발진 기지로 성격이 바뀌고 있으며, 대만해협 문제에 한국군까지 동참해야 한다는 압박이 뒤따르고 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미국이 주한미군 역할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전작권 환수는 한국이 요구하기 이전에 구조적으로 떠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한·미동맹은 한국이 비용을 감수하며 미국의 전략적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재편될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번 주한미군 감축 논란은 단순한 병력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안보와 동맹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