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내란 사태로 정국이 혼란한 사이, 남·북·미 관계를 북·미·일 관계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일본 외교가에서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오는 3월 말 또는 4월 초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7일(현지 시각) 이시바 총리는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 직후 발표된 미·일 공동성명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으며, 일본인 납치 문제의 ‘즉시 해결’을 강조했다. 미국이 이를 지지한다고 밝힌 점에서 이시바 총리의 방북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와의 회담 직후 내각 관방실에 북한 측과의 접촉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약 한 달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3월 말~4월 초 방북이 가능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은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강력한 메시지로, 동시에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위한 중재자 역할까지 노리고 있다는 해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급한 국제현안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북한 문제에 직접 뛰어들기 어려운 처지다. 이 공백을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으로 메우는 구도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맡았던 남북미 3자 관계 중재자 역할을, 이번에는 이시바 총리가 이어받는 그림이다.
일본은 납북자 문제 해결을 대외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 목적은 평양 내 연락사무소 설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일본 정부 인사가 북한에 상주하게 되면, 동북아 정세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이시바 총리는 전임 기시다 총리로부터 북일 간 비공식 채널을 이어받은 상태다. 기시다는 지난해 북한과의 막후 협상을 통해 연락사무소 개설과 납북자 문제 해결, 총리직 재선을 동시에 노렸으나 무리한 요구로 북한의 반발을 샀다. 이를 계승한 이시바는 ‘조건 없는 평양 방문’이라는 새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 이는 2014년 체결된 스톡홀름 합의의 재판을 노리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태도다. 지난해 말부터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접근에 대해 ‘최강경 대응 전략’을 표방하며 협상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만 북한이 일본을 매개로 경제적 실리를 얻고 중국과의 관계를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시바의 방북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또한 대선 승리 이후 북한과의 조기 접촉을 시도했으나 북측은 일단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는 이시바 총리를 앞세워 북한과의 간접 소통을 꾀하는 모양새다. 5월 방북 구상을 위해 이시바 총리를 먼저 평양에 보내려는 전략이 일본 외교가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시바의 평양행이 늦어도 4월 초까지 이뤄질 것이란 전망에는 한국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도 작용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혼란한 과도기를 틈타 일본이 외교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이번 미일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비핵화’ 대신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이 쓰인 점은 한국 배제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주도하게 되면, 향후 북핵 문제와 동북아 안보 구도 전반에서 한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 있다. 일본의 일방적인 행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시바의 방북 시점과 의제, 그리고 그에 따른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