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학생운동 진영을 관통한 사회구성체 논쟁은 한국 사회의 성격과 변혁 전략을 둘러싼 이념 논쟁으로, 이후 진보정치권의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계열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본격화됐다. 학생운동 진영은 신군부의 집권과 광주 학살을 겪으며 기존 민주화 요구만으로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토대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초기 논쟁은 1980~1983년 준비기를 거치며 형성됐다. 서울역 회군 이후 운동권 내부에서는 향후 투쟁 방식을 둘러싸고 무림과 학림 간 논쟁이 벌어졌다. 무림은 장기적 준비를 강조했고, 학림은 즉각적인 투쟁을 주장했다.
1984~1985년에는 이른바 CNP 논쟁이 전개됐다. 시민민주혁명(CDR), 민족민주혁명(NDR), 민중민주혁명(PDR) 노선이 경쟁했다.
CDR은 군사독재 타도를 통한 시민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PDR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 삼으며 노동계급 중심의 혁명을 주장했다. NDR은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반제국주의와 반독점자본 투쟁을 동시에 강조했다.
당시 학생운동의 다수파는 NDR이었다.
1986년 이후에는 북한 주체사상을 소개한 ‘강철서신’이 대학가에 확산되면서 운동권 내부 구도가 다시 변화했다.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을 우선시한 세력이 NL로 성장했고, 이에 반대하며 민주주의 혁명 완성을 강조한 세력은 CA(제헌의회) 노선을 형성했다.
NL은 한국 사회를 미국 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하고 민족해방과 통일운동을 중시했다. 반면 CA는 민주주의 혁명과 노동계급 중심의 정치 변혁을 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대중운동을 전개한 NL이 주도권을 확보했다.
1989년 이후에는 CA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일부는 NL에 합류했지만 주체사상을 수용하지 않는 비주사 NL 세력으로 남았고, 다른 일부는 PD 계열로 이동했다.
PD는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을 민족 문제가 아닌 계급 문제로 규정했다. 미국의 영향력보다 자본주의 체제와 노동 착취 문제에 주목했으며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이론을 중시했다. 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다.
결국 NL은 민족 모순을, PD는 계급 모순을 중심에 놓고 한국 사회를 해석했다. 두 흐름은 이후 민주노동당과 진보정당 운동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충돌하며 한국 진보정치의 주요 축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1990년대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와 학생운동 쇠퇴, 민주화 진전에 따라 사회구성체 논쟁은 급속히 힘을 잃었다. 그럼에도 NL과 PD라는 정치적 계보는 오늘날까지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일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