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8월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발생한 이른바 ‘연세대 한총련 사태’는 한국 학생운동의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집단 시위로 기록된다. 이 사건은 집회·시위 양상, 공권력 투입 규모, 연행·구속 인원 모두에서 전례 없는 수치를 남겼다.
사태의 발단은 8월 15일 연세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였다. 당시 범민련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등 민족해방 계열 단체가 주도한 이 대회에 대해 정부는 친북 성향 집회로 판단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정부는 연세대 캠퍼스를 전면 봉쇄했다.
8월 16일 저녁부터 경찰은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투입해 캠퍼스 진입 작전에 나섰다. 전경 50개 중대 약 6000명, 경찰특공대 36명, 조명차 4대, 조명탄 4000여 발, 고가사다리와 그물 등이 동원됐다. 학생들은 과학관과 종합관 등 건물 옥상에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투석에 사용된 돌 상당수는 지질학과 실습·연구용 희귀 암석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최루탄과 조명탄을 사용하며 압박을 강화했고, 헬기까지 투입돼 최루액이 살포됐다. 8월 20일 새벽 5시 50분, 전경 16개 중대 약 2000명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종합관에 진입했다. 진입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종합관에 있던 학생들은 저항을 중단하고 연행됐다.
그러나 이과대 일대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일부 학생들은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화염병과 돌, 의자 등을 던지며 저항한 뒤 학교 뒤편 안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이 연희동 등 인근 주택가로 흩어졌고, 경찰은 주택가 검거 작전을 병행했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연세대 인근 주택가에서만 1043명이 검거됐다. 연세대 한총련 사태 전체로는 총 5848명이 연행됐고, 이 가운데 462명이 구속됐다. 단일 사건 기준으로 당시까지 최다 연행·구속 기록이다.
사태 이후 연세대는 심각한 물적 피해를 입었다. 과학관과 종합관 등 주요 건물 곳곳이 훼손되거나 화재 피해를 입었고, 캠퍼스 내 성한 유리창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학교 시설 복구에는 약 2년이 소요됐다. 같은 해 가을 예정됐던 고려대·연세대 정기교류전은 열리지 않았다.
정치·사회적 여파도 컸다. 1996년 11월 실시된 연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비운동권 후보가 전 단과대 1위, 과반 득표로 당선됐다. 이는 이후 대학 사회에서 학생운동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언론 환경에서도 상징적인 변화가 남았다. 1987년 전후 시위 현장은 신문 지면의 단골 소재였고, 사진기자들의 필수 장비는 헬멧과 방독면이었다. 국내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방독면을 실제로 사용한 마지막 현장 역시 19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