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인식의 지형이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통일교육은 여전히 당위적 언어에 머무르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현장에서 제기됐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조사에서 통일을 국가의 대북정책 목표로 꼽은 응답은 15%에 불과했고, 평화공존을 우선해야 한다는 응답은 65%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대별 생활세계에서 통일의 의미가 완전히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17일 국민대에서 열린 ‘통일 여건의 악화와 통일교육의 방향’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은 통일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기존 방식 대신 통일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어떤 가치와 언어를 통해 설명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다.
최완규 전 북한대학원대 총장은 통일 여건 악화의 원인을 북한 내부 구조 변화에서 찾았다. 그는 북한의 폐쇄성 심화와 경제 악화가 남북관계를 반복적으로 흔드는 근본 배경이라고 진단했다. 북한이 필요할 때만 협상에 나오고 상황이 바뀌면 즉시 접는 전략적 태도도 통일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남남갈등을 핵심 문제로 제시했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받아온 교육의 방향과 통일을 바라보는 감각 자체가 달라지면서 통일 논의가 다층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공 중심 교육을 경험한 세대와 상호이해·공동번영 프레임을 내면화한 세대 간 시각 차이가 커졌다는 것이다.
백준기 한신대 교수는 포퓰리즘 정치 환경 속에서 통일 이슈가 점점 주변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평화·통일·민주시민교육을 통합한 교육 모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민주주의 가치 회복이 청년세대의 통일 의제 수용에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수석 국민대 특임교수는 통일 논의의 철학적 기반을 환기했다. 그는 분단은 현실이지만 통일은 이상이라며, 이상을 포기한 현실은 미래세대의 꿈을 빼앗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통일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는 가치라고 규정했다.
김형석 대진대 특임교수는 통일교육 제도와 구조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콘텐츠는 충분하지만 이를 지속 실행할 제도와 재정 기반이 취약해 일회성 사업에 머무른다고 평가했다.
현장의 문제의식은 예산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현철 국민대 통일교육사업단장은 통일교육 예산 260억원이 인구 기준 1인당 약 500원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는 통일교육이 의무교육도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기본적 토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성인이 된 뒤 논의를 시작할 근거 자체가 사라진다고 우려했다. 이어 17조2000억원 규모의 남북협력기금을 통일교육에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통일교육을 점진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범수 서울대 교수는 데이터와 규범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선 조사 결과를 다시 인용하며 세대별 통일 인식의 차이가 이미 구조적 변화가 됐음을 지적했다. 통일교육의 기준은 헌법과 유엔헌장에 담긴 평화·민주 가치에 기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학생들의 질문은 더욱 현실적이었다. 통일이 개인의 이익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현재 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인지, 북한이 경제적 자립을 이룬 뒤 굳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등 통일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겨냥한 질문이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통일교육이 이제 통일을 해야 한다는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평화, 민주주의, 세대 이해, 동아시아 질서 등 복합적 요소를 함께 다루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통일을 하나의 ‘정답’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통일을 둘러싼 현실과 이상, 이익과 가치, 세대별 고민을 함께 풀어내는 교육이 앞으로의 과제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