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체제는 1951년 9월 8일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이어진 미일 안보조약을 축으로 성립한 동아시아 전후 질서다. 48개국이 조약에 서명했지만 남북한, 중국, 대만, 소련은 배제되거나 불참했다. 이는 냉전 구도의 시작과 맞물리며 동북아 갈등의 근원이 됐다.
당시 조약은 중국, 한반도, 소련과의 영토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미해결 상태로 남겼다는 연구가 제기돼 왔다. 하라 기미에 워털루대 교수는 “조약의 모호한 조항들은 실수가 아니라 분쟁의 씨앗을 남기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독도, 센카쿠(댜오위다오), 쿠릴열도 등 영토 갈등은 이후 심화됐다.
GHQ가 천황을 전범 재판에서 제외하고 일부 군 지도자들만 처벌한 결정은 일본 사회의 전쟁 책임 인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제국주의적 폭력과 침략 책임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기보다 일부 전범의 문제로 축소시켰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이탈리아가 맺은 강화조약과 달리 비징벌적이었다. 이탈리아 조약에는 전쟁 도발 책임이 명시됐지만, 일본 조약에는 전쟁 책임·영토 할양·배상 의무가 명확히 적시되지 않았다. 일본은 국제법적 책임을 회피한 채 도쿄재판에 회부된 전범 개인의 문제로 한정했다.
조약에서 배제된 한국과 중국은 이후 양자 협상으로 관계를 정리했으나, 난징대학살·위안부·강제동원 같은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이들 과제는 탈냉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다시 쟁점으로 부각됐다.
또한 한국의 조약 참가를 영국이 반대한 배경에는 중국과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었다. 영국은 홍콩과 동남아 상업적 지분 확보를 위해 공산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영국의 입장을 수용했다. 이로써 미국은 한때 임시정부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며 한국의 참가를 지지했음에도, 결국 배제 쪽으로 선회했다.
조약 협상 과정에서는 일본 외무성이 GHQ 외교국장 윌리엄 시볼드에게 은밀히 친일적 보고서를 전달하는 등 로비도 이뤄졌다. 시볼드는 일본에는 우호적이었지만 한국을 ‘슬프고 가난한 민족’으로 폄하했다. 이 같은 과정 속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일본에 관대한 평화조약이 되었고, 전후 질서의 불균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