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의 회고록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 한반도 외교의 내막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의 전개 과정, 한미일 안보협력의 갈등, 그리고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압박까지, 외교 무대의 긴장과 계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싱가포르 회담 전후 – 한국의 주도, 미국의 회의
2018년 봄,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의 초청장을 워싱턴에 전달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충동적으로 이를 수용했다. 볼턴은 이 과정을 “한국이 만든 외교적 춤판”이라 지적하며, 이는 김정은의 전략이 아니라 한국의 통일 의제와 밀접하다고 평가했다.
일본은 미국과 유사하게 북한의 핵 포기 의지를 불신했다. 아베 총리와 야치 국장은 ‘행동 대 행동’ 접근법이 북한에 유리할 뿐이라며, 반드시 구체적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아베는 북핵 폐기를 6~9개월 내 마무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트럼프에게 강력히 전달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싱가포르 회담은 겉으로는 성공처럼 포장됐지만, 볼턴의 묘사에 따르면 “보여주기 위한 행사”에 불과했다. 트럼프는 훈련 중단을 즉석에서 약속했고, 김정은은 “유엔 제재 해제”를 다음 주제로 제시했다. 이후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방북에서 빈손으로 돌아왔고, 트럼프는 “신뢰구축은 개소리”라며 분노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노이 회담 결렬 – ‘노딜’의 배경
2019년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완화 문제에서 충돌하며 무산됐다. 볼턴은 국무부 협상팀이 ‘점진적 접근’에 빠져 통제 불능이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레이건 대통령의 레이캬비크 회담 사례를 트럼프에게 보여주며 “걸어나올 준비”를 시켰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트럼프는 회담 도중 “스몰딜과 결렬 중 어느 쪽이 더 기사거리냐”고 물을 정도로 정치적 계산에 몰두했다. 결국 김정은의 제안은 거절됐고, 회담은 공동성명조차 없이 끝났다. 볼턴은 이를 “트럼프의 유일한 옳은 선택”으로 평가했다.
판문점 회동 – ‘사진행사’로 남은 역사
하노이 결렬 이후에도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관계에 집착했다. 2019년 6월 오사카 G20 회담 직후,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판문점 회동을 제안했고, 이는 즉흥적으로 성사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3자 회동으로 만들려 했지만 북한은 단호히 거절했다. 트럼프는 내부적으로 “문 대통령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외부적으로는 문 대통령과 함께 DMZ에 들어서는 모습을 연출했다.
볼턴은 이를 “가치 없는 만남”으로 평가하며, 사진과 이벤트에 집착한 트럼프의 태도를 비판했다.
방위비 분담 – 트럼프의 ‘협박 카드’
볼턴 회고록은 방위비 분담 협상에서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를 협상 카드로 삼았음을 기록한다. 트럼프는 “50억 달러를 받지 못하면 철수해”라는 말을 반복하며 한국을 압박했다. 심지어 북한 미사일 발사 국면조차 “돈을 요구할 적기”로 언급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한국의 국방비 지출이 높은 수준임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협상 요소로 보지 않았다. 대신 무역 적자 문제까지 연계하며, 한국이 ‘미국의 보호’를 받는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논리를 밀어붙였다.
한일관계와 GSOMIA – 동맹 갈등의 그림자
볼턴은 일본과의 협의에서 야치 국장이 문재인 대통령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부정한다고 강력히 비판했음을 기록했다.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할 의지가 있었으나, 한국과의 합의가 무력화된다면 북일 협상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특히 GSOMIA 문제는 단순한 양자 협정이 아니라 미국의 안보 이익과 직결돼 있었다. 볼턴은 한국의 파기 검토가 한미일 안보협력을 저해한다고 지적하며, 동북아 질서에서 한일 협력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결론 – 동맹 관리 실패와 ‘쇼’로 끝난 비핵화
볼턴 회고록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쇼에 가까운 외교 이벤트’로 묘사한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 진전을 집요하게 추진했으나,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의지가 없음을 전제로 움직였다.
결국 싱가포르의 약속은 공허한 선언에 그쳤고, 하노이는 결렬로 끝났으며, 판문점은 사진행사로만 남았다. 여기에 방위비 분담과 한일 갈등까지 겹치며 동맹의 균열이 드러났다. 볼턴의 회고록은 트럼프 시기의 한반도 외교가 환상과 불신, 그리고 계산된 이벤트의 연속이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