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물급 북한 공작원 신광수는 일본인으로 위장해 간첩 활동을 벌인 인물로, 일본인 납치에 직접 가담하고 김정일로부터 공작 지시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2000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비전향 장기수’ 명목으로 북한에 송환되면서 논란을 불렀다.
신광수는 1929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나 해방 후 한국에 귀국했으며, 포항중학교에 재학 중 좌익 활동에 가담했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자원입대한 그는 전후 월북해 루마니아에서 유학, 북한 과학원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인민무력부 정찰국 공작원으로 전환됐다.
그는 1973년부터 일본에 밀입국해 조총련계 인사들을 포섭하고 공작 거점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조총련 상공회 인사들을 협박해 공작금을 갈취하고, 북한에 가족이 있는 점을 빌미로 12명을 포섭했다. 당시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일본인 납치였다.
신광수는 1980년 북한에 복귀해 김정일로부터 직접 납치 공작을 지시받았다. 김정일은 “45~50세 미혼에 가족이 없고, 여권 발급 경험이나 지문 날인, 금융 기록이 없는 일본인을 골라라”고 지시했으며, 이 지침에 따라 납치된 인물이 오사카 중국집 ‘보해루’의 요리사 하라 다다아키였다.
신광수는 하라를 유인해 규슈 미야자키현 아오지마 해안에서 북한 공작원들과 함께 납치한 뒤, 평양에서 하라의 모든 신상정보를 숙지하고 중국요리 기술까지 습득했다. 이후 하라 다다아키의 이름으로 여권, 운전면허증, 건강보험증 등을 발급받아 일본과 동남아, 유럽을 오가며 최소 여섯 차례에 걸쳐 일본에 침투했다.
그는 재일 민단 간부 포섭, 정보 수집, 공작금 조달 등 각종 활동을 벌였으며, 한성익, 이동철, 방원정 등 조총련·민단 인사들을 협박해 자금을 갈취하거나 북한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신광수는 일본인 납치 공작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요코타 메구미 납치에도 연루된 정황이 있다. 납북 일본인 소가 히토미는 평양에서 신광수에게 조선어를 배운 경험이 있다고 증언하며, 그가 요코타를 직접 납치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만약 사실이라면 하라 다다아키 외에도 요코타 메구미, 지무라 야스시 부부 등 총 4명의 납북에 신광수가 관여한 셈이다.
하라 다다아키는 납북 이후 북한에서 다구치 야에코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북한은 1986년 그가 간경변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생존 여부에 대해서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신광수는 1985년 서울에 침투해 간첩 활동을 벌이다 체포됐다. 당시 옷깃에는 자살용 독약 앰플을 숨기고 있었다. 1988년 사형이 확정됐지만 같은 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99년 김대중 정부의 ‘밀레니엄 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됐다.
이 송환 조치에 대해 일본은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신광수의 납치 혐의를 확인하고 인터폴을 통해 국제수배했으며, 신병 인도를 요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신광수가 원하지 않는다”며 면담조차 거부했다. 일본 측은 공범자만 면담할 수 있었다.
신광수는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인을 납치한 범인으로 확인된 사례다. 수사 과정에서 그는 김정일로부터 직접 납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신광수를 송환함으로써 김정일의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핵심 증인을 사실상 북으로 넘긴 셈이 되었다.
이 사건은 북한의 대남 및 대일 간첩공작 실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일본인 납치 문제의 핵심 인물이 한국 정부에 의해 북송된 예외적 사례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