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남북관계를 단절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미관계의 협상 구조까지 바꾸려는 전략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을 통일과 대화의 상대에서 배제한 뒤 미국과 핵보유국 대 핵보유국의 관계를 설정하고 직접 협상에 나서겠다는 구상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23년 12월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이자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했다. 북한은 이후 통일 관련 조직과 상징물을 없애고 한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헌법에 규정했다고 밝혔다.
반면 미국을 향해서는 대화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2025년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좋은 추억”을 언급했다. 미국이 비핵화 요구를 포기하고 북한의 현실을 인정한다면 미국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도 밝혔다.
북한은 2026년 노동당 제9차 대회에서도 한국을 동족의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하겠다는 태도를 재확인하면서 미국과는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한국에는 적대관계를 고착하면서 미국에는 조건부 대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북한의 전통적인 ‘통미봉남’ 전략이 한층 강화된 형태로 평가된다. 남북대화를 거치지 않고 미국과 직접 협상함으로써 한국의 역할을 축소하고 한미 간 대북정책의 틈을 넓히려는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원하는 협상의 출발점도 과거와 달라졌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당시에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공동성명에 포함됐다. 그러나 북한은 이후 핵무력을 헌법과 법률에 명시하고 핵무기 보유를 되돌릴 수 없는 국가노선으로 규정했다.
현재 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것은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핵보유 현실을 전제로 한 군비통제와 관계 정상화 협상에 가깝다. 핵무기 폐기보다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제한, 제재 완화, 연락사무소 설치, 평화체제 구축 등을 교환하는 단계적 협상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공식 입장과는 간격이 크다. 트럼프 행정부는 김 위원장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기존 목표를 유지하고 있다. 2026년 미국과 일본도 정상 차원의 합의를 통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원칙을 재확인했다.
북미관계의 핵심 쟁점은 결국 협상의 목적이다. 미국이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유지하는 동안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먼저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양측 모두 정상 간 만남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더라도 협상의 출발점과 종착점이 서로 다른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8월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을 만나 한반도 평화를 만드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정상 간 친분과 만남 의지만으로 비핵화와 제재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하노이 회담 결렬의 교훈이다.
북한에는 달라진 대외환경도 협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 러시아와의 군사·경제 협력이 확대되면서 미국의 제재 완화에 대한 의존도가 과거보다 낮아졌다.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추가 대북제재에 반대하면서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 체계도 약화했다.
북한은 이를 바탕으로 미국이 먼저 양보하지 않으면 대화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계속 높여 협상 가격을 끌어올린 뒤 미국의 정권 일정과 국제정세를 보며 정상외교에 나서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북미협상에서 한국을 배제할 명분으로도 활용된다. 북한은 한국을 같은 민족이나 중재자가 아니라 미국의 동맹이자 직접적인 적대국으로 규정한다. 미국과는 전략무기와 제재, 관계 정상화를 협상하면서 한국과는 군사적 대치만 유지하는 분리 전략이다.
북미대화가 재개되더라도 남북관계 개선으로 곧바로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유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핵보유 현실을 인정받고 제재 완화와 군사적 위협 감소를 확보하면서도 한국에 대한 적대노선은 유지할 수 있다.
한국으로서는 북미 정상 간 직접 협상이 한반도 긴장을 낮출 기회인 동시에 협상 과정에서 소외될 위험도 안고 있다. 미국이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제한에 우선순위를 두고 한국을 겨냥한 단거리 미사일과 전술핵 문제를 뒤로 미룰 경우 한미 간 이해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북미대화를 지지하면서도 한미 간 긴밀한 사전 조율을 강조해야 하는 배경이다. 북미협상에서는 북한의 핵무기뿐 아니라 한국을 위협하는 단거리 미사일, 전술핵, 재래식 군사력과 우발적 충돌 방지 문제도 함께 다뤄져야 한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아래에서 북미관계는 ‘비핵화를 위한 협상’과 ‘핵보유국 간 공존 협상’ 사이의 힘겨루기로 바뀌고 있다. 미국은 비핵화 원칙을 고수하고 북한은 핵보유 현실의 인정을 요구한다.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정상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선언적 합의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
향후 북미관계의 최대 변수는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 현실을 어느 수준까지 협상의 전제로 받아들일지다. 동시에 한국이 북미협상의 촉진자에 머물지 않고 한반도 안보의 직접 당사자로서 협상 의제와 결과에 참여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적대적 두 국가론이 굳어질수록 북미대화의 필요성은 커지지만 한국이 감당해야 할 외교·안보적 위험도 함께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