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민을 만나온 13년, 우리 사회가 아직 마주하지 못한 거리(距離)에 대하여 —
업무상 나는 늘 탈북민을 만난다. 그런데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면 으레 질문이 쏟아진다. 북한 사람들은 정말 어떠냐고, 무섭지는 않으냐고, 왜 목숨까지 걸고 내려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 질문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3만 4천여 명에 이르는 탈북민이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궁금한 대상’에 머물러 있다. 무관심과 낯섦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그들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그들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그들을 잘 알았던 것은 아니다. 13년 전, 이 분야에 막 발을 들였을 때 나 역시 막연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분단의 시간이 만들어 낸 선입견은 생각보다 깊어서, 처음 마주 앉았을 때는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그들은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웃이었다. 부모의 건강을 염려하고, 자식의 교육과 진로를 고민하며, 다달이 돌아오는 생활비와 막연한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쓰는 억양이 조금 다르고 살아온 체제가 달랐을 뿐, 사람이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의 모양은 똑같았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왔고, 시간이 그 무지를 걷어 내자 남은 것은 그저 평범한 이웃의 얼굴이었다.
다수의 탈북민은 우리 사회에 성실히 뿌리내리고 있다.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리며, 저마다의 자리에서 묵묵히 삶을 일궈 나간다. 그러나 겉으로 잘 적응한 이들에게서조차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다. 바로 정체성의 혼란이다.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탈북민이 남과 북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서의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해 왔다. 이 혼란은 그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기 때문에 생겨나는,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을 “먼저 온 통일”이라 부르며 환대하다가도, 막상 한 사람의 이웃이나 동료, 사위나 며느리의 자리에서는 어딘가 미묘하게 머뭇거린다. 받아들이는 듯하면서도 끝내 한 걸음의 간격을 남겨 두는 이 모순된 태도를, 그들은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한다.
거리는 때로 마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된다. 2019년 여름, 서울 관악구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탈북민 어머니와 여섯 살 난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나서였다. 냉장고에는 고춧가루 한 줌만이 남아 있었고, 요금을 내지 못해 수도마저 끊긴 상태였다. 부검에서도 사인은 끝내 ‘불명’으로 남았지만, 끼니를 잇지 못한 정황은 뚜렷했다. 받을 수 있었던 복지의 손길이 분명히 있었으나, 정작 그 손길은 끝내 그에게 닿지 못했다. 이 비극은 우리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더 뼈아픈 것은 따로 있다. 한 가족이 두 달이 넘도록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만큼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 단절의 깊이다.
이런 고립은 결코 예외적인 한 사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탈북민은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거나 스스로 삶을 놓아 버리고 싶은 생각을 품는 비율이 일반 국민보다 높게 보고되어 왔다. 정부의 관리망에서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고, 더러는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었던 이들이 끝내 그 국경을 거슬러 가는 역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내몰았는지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의 끝에는 대개 같은 답이 놓여 있다. 제도의 빈틈, 그리고 그 빈틈을 메워 줄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끼리라도 서로 의지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탈북민 사회’는 하나로 묶인 동질적 공동체가 아니다. 출신 지역과 입국 시기, 북에서의 처지와 남에서의 형편, 정치적 성향과 단체 간의 입장 차이에 따라 그 안에서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오히려 정착의 불안이 클수록 서로를 끌어안기보다 각자도생으로 흩어지기 쉽다. 이는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 안정된 발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겪는 자연스러운 결과에 가깝다. 결국 그들이 기댈 가장 든든한 울타리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 우리 사회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제도는 그들을 같은 국민으로 등록했고, 정착을 돕는 여러 장치도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받아들임’은 아직 ‘곁을 내줌’에 이르지 못했다. 서류는 그들을 국민의 자리에 올렸지만, 우리의 일상은 아직 그들을 이웃의 자리에 앉히지 못했다. 내가 탈북민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돌아오는 그 수많은 질문이 바로 그 증거다. 언젠가 그 질문들이 옆집 사람의 안부를 묻는 일처럼 평범하고 무심해지는 날,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년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는 그날이 아직 멀리 있다는 씁쓸한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은 멀리 있는 거대한 사건이기 이전에, 지금 내 옆자리에 앉은 한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김한솔은 북한·한반도 통일 문제를 다루는 서울 소재 시민사회단체의 사무국장이자,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서 북한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