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가을, 소위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으로 불린 10·28 건대 항쟁은 1288명의 구속자를 남기며 학생운동 진영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강경 진압 과정에서 중상자가 속출했고, 전신 화상과 장기 후유증 사례까지 나왔다. 참혹한 현장, 신뢰를 잃은 언론, 진실에 대한 갈증이 겹치며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급속히 퍼질 조건이 갖춰졌다.
당시 대학가와 지역 사회에는 “건대 항쟁으로 수십 명이 숨졌다”는 말이 돌았다. 구체적인 사인까지 덧붙여진 소문은 사실처럼 유통됐다. 이 흐름 속에서 부산 산업대학교 재학생 진성일이 투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 복무를 마친 복학생이던 그는 운동권 조직과 거리가 있었지만, 건대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분노해 총학생회를 찾았다. 학교는 축제 준비에 몰두했고, 문제 제기를 하던 학생들이 폭행당했다는 증언도 뒤따랐다.
진성일은 ‘미약한 존재지만 격분을 참을 수 없다’는 취지의 글을 남기고 투신했다. 그의 죽음 이후 산업대에는 수천 명이 모여 장례를 치렀고, 총학생회 불신임 결의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건대 항쟁의 강경 진압은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던 대학에 불씨를 던졌고, 이듬해 6월 항쟁 국면에서 산업대는 부산 지역의 핵심 거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실제로 건대 농성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유언비어는 사실을 압도했다.
그로부터 보름여 뒤인 11월 중순, 또 하나의 대형 소문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김일성 피살’ 사망설이었다. 당시 신문 호외에는 캐리커처와 함께 “총격으로 사망”이라는 제목이 실렸고, 휴전선 전역 인공기 조기, 대남 방송, 장송곡, 군부 내 권력 투쟁, 일부 장교의 중국 피신 등 구체적 정황이 기사화됐다. 대중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버스와 교실에서 전쟁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소문은 증폭됐다.
그러나 평양 방송은 침묵했고, 예정됐던 몽골 국가원수의 방북 일정 변경도 없었다. 11월 18일, 방북 행사에 김일성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망설은 일순간에 붕괴됐다. 오보를 낸 언론은 북한의 심리전을 문제 삼았고, 북한 역시 남측의 보도에 당혹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사망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기됐다. 북한군 선전방송의 추도 표현을 오인한 보고가 확대됐다는 설, 감청 과정에서 ‘갔다’는 표현을 ‘사망’으로 잘못 해석한 뒤 확인 표기가 오인되며 확산됐다는 설 등이 대표적이다. 조기와 대남 방송 등 당시의 정황이 집단적 오인인지, 북한의 심리전이었는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1986년의 한국 사회가 신뢰 가능한 정보원에 목말라 있었다는 점이다. 검증되지 않은 소문은 빠르게 유통됐고, 반복되며 사실로 굳어졌다. 고등학생들까지 유언비어를 교환하며 ‘진실의 조각’을 좇았다. 그해 겨울, 교실의 소란과 함께 “이제 곧 고3”이라는 현실이 다가왔다. 이듬해 1987년, 사회 전체를 뒤흔든 격변의 해를 앞둔 전야였다.